1910년 8월 14일, 파리와 파리지앵의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 중 한 명이 파리 9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 애호가인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러시아 제국의 대학살을 피해 피난 온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윌리 로니스는 1910년 8월 14일 몽마르뜨 언덕 아래에서 사진 리터처로 일하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윌리는 여전히 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그의 15번째 생일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선물했습니다.
이는 윌리 로니스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그는 파리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브라사이, 피에르 부셰, 로기 앙드레의 작품에 특히 관심을 갖고 파리 시민들의 삶의 순간을 필름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윌리 로니스는 193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전선이 승리하면서 정치와 사회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열정적으로 따라다니며 잡지 <안부>를 위해 인상적인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노동자의 세계에 대한 그의 열정은 평생 동안 이어져 1938년 자벨 광장에 있는 시트로엥 공장의 파업 (유명한 노조원 로즈 제너의 초상화를 그린 곳)과 1948년 생테티엔 광산의 파업 , 1950년 빌랑쿠르의 르노 공장의 파업을 기록하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그는 친구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 함께혁명적 작가 및 예술가 협회(Association des écrivains et artistes révolutionnaires) 에 가입한 후 1945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3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아버지의 사진 스튜디오가 매각된 후 윌리 로니스는 포토저널리즘으로 전향했고, 그 첫 번째 작품이 SNCF와 관광청의 커미션이었습니다. 하지만 1940년 비시 정권이 집권하면서 그는 수도를 떠나야 했습니다.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것과 노란 별을 달기를 거부한 윌리 로니스는 비밀리에 분계선을 넘어 니스, 칸, 보클루즈의 자유 지대에 숨어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브라사이와 도이스노를 필두로 한 당대 최고의 사진작가들과 함께에이전시 라포에 합류하여 유럽 전역을 돌며 일련의 보도 사진을 찍고 아메리칸 라이프 등 여러 잡지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러나 1955년에 떠난 라포 에이전시와 마찬가지로 윌리 로니스도 자신의 사진 작품이 수정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는 것을 거부하며 라이프와의 협업을 끝냈습니다.
사진가로서 활동하는 내내 파리를 사랑하고 전후 사진의 휴머니즘 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우연과 불확실성, 삶의 우연에 베팅하면서 연출 없이 순간적으로 촬영한 사진을 선호했습니다.
파리의 노동자 계급 지역인 벨빌과 메닐몽탕에서 그는 남녀노소, 파리지앵의 일상과 대중의 환희의 순간을 포착하여 가장 시적이고 부드러운 작품의 대부분을 촬영했습니다.
관절염에 시달리던 윌리 로니스는 2002년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2009년 9월 12일 자신이 사랑하던 파리에서 100세에 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치
몽마르뜨
Montmartre
75018 Paris 18
추가 정보
사진: 1957년 파리 바스티유, 1957년 파리 바토무슈, 1949년 파리 쁘띠 파리지앵, 1952년 © Ministère de la Culture -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P, 윌리 로니스 기증